사람 얼굴은 정말 매력적이다. 아주 조그마한 움직임만으로도 느낌이 무척이나 달라진다. 영화관 같은 곳에서 커다란 화면으로 확대된 배우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미묘함은 배가된다. 확실히 마음을 움직이는 점이 있다. 사진을 찍을 때면 종종 사람 얼굴을 잔뜩 당겨서 화면에 담곤 하는데, 일관된 취향인가보다. 대화 할 때 사람들 눈을 바라보거나,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처다보는 것도. 누군가 너는 사람들을 관찰해!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런 행동 때문이었나보다.
그 사람과는 어째서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냐고 내가 묻자, "공통점이 있잖아, fidelity"라고 간결한 답이 돌아왔다. 난 어떤 의미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"fi...뭐?"라고 되물어야 했는데, 가만 생각해 보니 영 못알아들을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.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상대방에 대한 기대와 그에 따른 충족/실망의 반복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, 두 사람의 관계는 그들이 서로의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켜주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. 내 질문을 받았던 사람은 자신이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조금 독특한 것들을 기대하는 것 같은데, 그걸 설명하는 말이 fidelity였나보다. '이러이러한 점에서 서로 죽이 잘 맞는다'는 말을 'fidelity'로 표현한 건 따지고보면 상당한 포장이다.
전라북도에 송광사라는 절이 있다. 전남에 있는 커다란 송광사와는 이름만 같은 곳인데, 완주군 소양이라는 동네에 있어 아는 사람만 아는 작은 절이다. 원래 별로 볼 게 없는 절이긴 했지만 사세가 점점 커지면서 절도 점점 볼품없이 커져서, 이제는 송광사에 가면 오히려 유머러스한 느낌까지 든다. 아무튼. 그럼에도 전주에 살던 때에는 그 멋없음과 헛헛한 느낌에 끌려 가끔 들러 앉아있곤 했었다. 송광사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절 앞길에 가득한 벗나무가 생각나고, 천왕문 앞을 꾸벅꾸벅 돌아다니던 두꺼비가 떠오른다. 천왕문을 지나서 행랑채 앞에 걸터앉아 대체 왜 이 절은 이렇게 생겼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.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행랑채 마루에 앉아서 빗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꽤 강하게 남아있는데, 아마 그때 처음으로 빗소리가 그렇게 크다는 걸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. 우두두두두둑. 말 소리도 차 소리도 냉장고 소리도 없는 우두두두두둑. 도시에는 소리가 많다. 도시에서 살면서 그나마 조용하다고 느낄 때에도 어디 멀리서 무언가가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소리는 사라지는 법이 없다. 귀는 눈과 달라서 닫아 막아버릴 수도 없다. 소리없음이 좀 부족하다. 지난 주말에 산 속에서 밤을 맞으면서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다시 했다. 그리 깊은 산 속도 아니었는데 그 아무것도없음이란게 무서울 정도였다. 아, 이런 느낌도 있었지. 달도 안뜬 밤 도솔산을 아슬아슬하게 걸어 내려올 때나 가로등 하나 없는 록키 산맥의 무슨무슨 공원이라는 곳에서 해지는 모습을 볼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. 고요함 속에서야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 첫글자 '고'만 봐도 지겨울 정도로 지루한 이야기지만.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면 나 자신 밖에 기댈 곳이 없어지는 것 같다. 그런 시간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.
내 책상 위에 있는 달력은 한화에서 만들어 배포한 달력이다. 한화라는 기업 이름을 일년에 한 번이나 들을까 말까 한 나로써는 이 달력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지만, 뭐 그다지 나쁘지 않아서 그냥 두고 쓰고 있다. 벽에 거는 달력은 기왕지사 예쁜 녀석이 좋지만, 탁상달력은 깔끔한 디자인에 메모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. 뭔가 일이 생기면 달력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어서 괜시리 워터마크로 배경이 들어가 있다거나, 캐릭터가 큼지막하게 들어간 달력은 오히려 불편하다. 새해가 시작되고 보름 정도 깨끗하게 남아있던 달력은, 요 얼마간 사이에 이런 저런 일정과 메모들로 빼곡하게 채워졌다. 지저분한게 글씨가 쓰여진 달력을 보고있으면 음, 결국 이렇게 되는 거지-하는 약간의 한탄과 오, 이것 봐라-하는 기대감이 동시에 든다. 기왕이면 재미있고 신나게. "새로운 거, 멋있는 거, 그런 거 못쓰는거야 아주"를 입버릇 처럼 달고 다니는 친구 녀석이 내 달력을 보면 "적당히 하고 관둬"라고 결연하게 참견하겠지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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